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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예술의 생존
작성일 2018.03.12 조회수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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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M=김선영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

4차 산업혁명의 기술들은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여준다. 물론 일자리 감소나 인공지능의 도전 등 걱정거리도 많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라는 속담처럼 우리는 지금 한편으론 우리의 의지에 따라, 또 한편으론 기술 자체의 추동력이 가져다주는 관성에 의해 달려가고 있다. 누구나 그려보았을 법하지만 그 누구도 그려볼 수 없는 미래를 향해서.

 

미국의 미디어컨설팅회사 엑티베이트(Activate)는 ‘기술과 미디어 전망(Tech & Media Outlook)2016’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인간의 하루가 31시간 28분으로 늘어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하루에 무려 7시간 28분이 늘어난다니 놀랍기도 하고 분 단위까지 거론하는 것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내역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물론 인간의 하루가 늘어나는 건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기술들의 활약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과 여유 시간 증가

자율주행자동차를 예로 들면 안전한 자율주행이 실현될 때 운전자의 역할은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자가운전자들에겐 적어도 출퇴근 시간에 해당하는 하루에 한 시간에서 두 시간 가까이 여유가 생긴다.

두바이의 볼로콥터 2X처럼 무인드론택시(Autonomous Aerial Taxi)까지 상용화되면 여유시간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사물인터넷 역시 마찬가지다. 굳이 집에 있지 않더라도 냉장고와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은 물론 가스, 전기 등 모든 사물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다.

심지어 이젠 명함을 정리하는 자투리 시간도 여유시간으로 바뀌고 있다. 악수만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스마트기술 덕택이다.

이밖에 인공지능 비서, 쇼핑을 대행해 주는 스타일리스트, 부모를 대신해주는 어린이용 웨어러블까지 수많은 기술이 여유 시간을 가져다준다.

 

 

자율주행차의 경우 이미 자동차 유리창에 대시보드가 디스플레이 되고 있다. 하지만 운전자의 전면유리창뿐 아니라 후면과 좌우 유리창 그리고 자동차 천장까지 디스플레이도 사용될 것이란 전망이다. 자동차 그 자체가 하나의 움직이는 매체가 되는 셈이다.

미디어는 신체의 확장이라는 마샬 맥루언(H. M. McLuhan)의 통찰에 다시 한 번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운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이상 차창에 표시되는 속도계나 유류계는 사실상 운전자의 관심 밖이다. 당연히 운전자를 비롯한 탑승자들은 운전 대신 이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동차에 특화된 콘텐츠를 찾게 된다. 그래서 콘텐츠 영역은 더욱 걸음이 바빠졌다.

 

이에 비해 순수예술은 어떤가. 클래식 음악을 보자. 이제까지의 자동차 운전자들 중에는 자동차의 라디오나 CD, MP3 플레이어 등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듣는 거 이외에는 별로 할 게 없으니까.

그런데 자율주행자동차 시대가 본격화되면 차내에서 클래식을 듣는 인구가 더 줄어들 것 같다.

자동차 외부의 풍경과 연계된 관광정보, 포켓몬 같은 증강현실 게임, 탑승자 신체의 작은 움직임을 인식한 상호작용 게임 등 즉흥적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고 실생활과 밀접한 콘텐츠가 유저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갈 때 순수예술이 설자리가 얼마나 남아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한류 대중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K-팝을 순수예술에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꼽고 있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순수예술과 대중예술간 자원경쟁이라고 표현한다. 자원경쟁은 소비자 자원, 생산자 자원, 매개자 자원, 그리고 공공자원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신동엽, 2016).

사실 이미 문화의 헤게모니는 대중문화와 문화산업 쪽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순수예술은 이미 자원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순수예술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발달은 순수예술로 하여금 기존에 처한 자원위기에 시간 자원의 위기까지 더해줄 가능성이 크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동안 우리는 주말에 영화를 보고, 일과를 마친 후 남는 시간에 게임을 했다.

이처럼 최근까지의 콘텐츠는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즐기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미디어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 콘텐츠와 일상의 경계는 흐려진다. 접하는 미디어가 많아짐에 따라 접하는 콘텐츠의 양 또한 많아진다.

하지만 이것이 다양성의 확장을 의미하지 않음을 우리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케이블, 위성, 멀티미디어 이동방송(DMB), IPTV 등 미디어가 늘면서 수많은 채널이 생겨났지만 프로그램의 다양성이 기대했던 만큼 확장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치열한 경쟁은 진지함을 추구하는 콘텐츠를 포함해 재미없는 콘텐츠를 더욱 소외시키고 퇴출시킨다. 4차 산업혁명 기술에 의한 여유시간의 증가는 이와 부수적으로 동행하는 미디어의 확장으로 인해 순수예술의 설자리를 더욱 좁게 만들 가능성이 큰 것이다.

 

공연장에 가면 예전에는 방송국 중계차 카메라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저작권 보호가 강화되면서 부터로 기억된다.

이제는 유명 예술가가 무대에 서거나 관객이 많이 드는 공연장이라 할지라도 중계 카메라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유는 공연단체들이 방송 저작권료를 요구하는 데 따라 가뜩이나 수익성이 나쁜 순수예술 공연실황 프로그램을 방송국들이 폐지하거나 축소하기 때문이다.

또는 사용되는 음악이나 대본 등에 대한 저작권 문제가 해결이 안 돼 공연단체가 실황녹화나 중계를 꺼린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 영상으로 녹화하거나 사진을 찍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렵다.

심지어 커튼콜 장면 촬영도 공연시작 전 안내방송을 유심히 듣고 허용여부를 체크해야 한다. 공연장의 몰입 분위기를 방해하는 것을 막고, 독창적인 공연 장면이나 요소들을 카피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유야 어찌됐든 순수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공연예술은 미디어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거나 적어도 다른 분야보다는 적응이 느리다. 물론 일부 뮤지컬이나 연극 공연을 중심으로 팟캐스트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한 생중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흐름도 최근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뮤지컬은 이미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에 있고, 생중계를 하는 연극공연은 대부분 신진작가나 연출가 혹은 새로 만들어진 소규모 작품에 국한된다. 순수예술이더라도 시각예술은 공연예술보다 미디어에 관대하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공연예술에 비하면 적극적이라 할 정도이다.

이제 극소수 유물전이나 근대 거장들의 특별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은 자유롭게 사진을 찍어 SNS를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에 올릴 수 있다.

 

첨단기술 적극 수용하는 시각예술

주지하다시피 이미 창작에서 시각예술은 다양한 첨단 기술과 미디어를 접목하는 데 공연예술보다는 개방적이다.

하지만 시각예술을 포함한 예술분야는 다른 분야에 비해 미디어와 4차 산업혁명의 기술들을 창작에서 수용하는데 상대적으로 그리 적극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 원로작가나 보수주의 예술가들에겐 새로운 기술이 전통적 표현 양식에 배치되는 것으로 부담스러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은 숙명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한다. 진보된 기술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도구이자 소재이다. 그런데 어찌 예술가 대부분이 새로운 기술을 외면하겠는가.

 

 

 

 

 

 

 

 

 

 

 

 

 

필자는 지난해 초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예술을 주제로 한 포럼에 참석한 적이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예술이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펼쳐지는 자리였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순수예술의 미래는 어둡다는 것이었다.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신기술들을 수용하기에 예술의 경제적 토양은 너무나 척박하다는 얘기였다. 참석자 대부분의 얼굴에는 암울한 회의가 시니컬하게 묻어 나왔다.

그 자리에서 논의된 바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의 기술들은 순수예술의 입장에서 보면 공염불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는 투자금 회수를 위해 기본적으로 수익을 최우선시하며 따라서 수익이 담보되지 않는 순수예술에 투자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1950년대의 건축가 로더릭 자이덴베르크(Roderick Seidenberg)는 인간을 무대 중앙에서 몰아내고 인간이 창조한 기계의 단순한 그림자로 축소시킨 기계 조직과 자동화 추세를 묘사하면서 머지않아 있을 인간의 종말을 예견한 바 있다.

종말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술 발달의 이면에는 언제나 획일성, 규칙성, 기계적 정확성과 확실성이 뒤따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설령 그의 주장에 동조한다고 할지라도 영국의 소설가 사뮤얼 버틀러(Samuel Butler)나 19세기 초 영국의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주장한 바와 같이 기계를 모두 파괴하고 새로운 기계를 만들려는 모든 시도들을 처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를 제어할 것인가?

 

적정기술과 예술의 가치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한 공동체의 문화적·정치적·환경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이론이다.

적정기술은 이상적인 표어일 수는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제어되거나 실현되기 쉽지 않다. 한편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지난 세기 동안 기계에 저항하면서 인간 정신의 자율성, 자발성, 무한한 창조성을 선포해 온 이들은 예술가들이다(Lewis Mumford). 결국 적정기술은 예술과 접목될 때 현실적으로 그나마 구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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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진보에 의해 인간이 추방자로 전락하고 나아가 난민이 되는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이다. 그래서 예술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기술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미디어의 경쟁에 예술이 뒤처지지 않도록 지원해야 한다.

예술이 풍요 속의 빈곤을 겪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여가가 늘어나면 내면을 수양하고 예술을 즐기고 생산하는 대신 기계화 과정에만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술이 4차 산업혁명 기술들과 손을 잡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기술의 폭주를 제어하고 때로는 새로운 길을 여는 영감을 주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지난 중세에 있었던 교회의 억압에 대한 저항은 주로 예술에 의해 나타났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기술의 진보에 의해 인간이 추방자로 전락하고 나아가 난민이 되는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이다. 그래서 예술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술이 본래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예술지원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는 보존가치가 뛰어난 예술을 지원하는 것이고, 둘째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 이를테면 예술의 본질에 지원하는 것이다.

예술지원의 성패는 그 두 영역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작 영역에서는 예술로 하여금 4차 산업혁명의 기술들과 그 어떤 영역보다 신속하고 면밀하게 손을 잡게 해 인간의 소외를 감시하고 제어하도록 해야 한다.

유통영역에서는 기술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미디어의 경쟁에 예술이 뒤처지지 않도록 지원해야 한다. 미디어가 발달할수록 다양성과 진지함이 퇴보하는 역설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술이 홀로 외롭게 고사되지 않도록 말이다.

이를 통해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고 4차 산업혁명 기술이 결합된 ‘순수예술’의 아름다움과 여유를 감상하며 출퇴근할 수 있는 권리를 우리 자신에게 부여해야 한다.

 

출처 : http://techm.kr/bbs/board.php?bo_table=article&wr_id=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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